삼 일 전 아내가 집을 나갔다. 일을 끝내고 새벽녘에 집으로 들어가니 식탁 옆 바닥에 입으로 베어 먹던 사과가 떨어져 있었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빛 때문이라고 해도 먹다 남긴 사과의 살은 너무 누렇게 변해 있었다.

화가 날 때 사과를 베어 먹으라고 아내에게 권한 것은 다케다였다. 잇몸을 통해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고 다케다는 아내를 위해 사과를 항상 집에 사두었다. 상황을 보니 아내는 몇 벌의 옷과 생활용품만 트렁크에 담아 발작적으로 뛰쳐나간 것 같았다. 시오도메의 고층 빌딩 꼭대기에 새로 개장하는 레스토랑의 도면 설계도가 갈갈이 찢겨지고 그중 가장 큰 조각에 이렇게 휘갈겨 써놓았다.

'바쁜 사람은 눈물을 흘릴 시간이 없다.'

다케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바이런의 말이었다.
다케다는 남자가 일하는 데 여자의 눈물만큼 거추장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싸울 때면 아내는 울면서 "당신은 내가 울고 있어도 신경도 안 쓸거야."라고 다케다를 몰아세웠고 그럴 때마다 다케다는 바이런의 말로 자신을 정당화했다.

- p 13, 14 첫번째 단편 아웃포스트 태번 중

필름 - 8점
고야마 군도 지음, 박소연 옮김/가람북

표지만 보고 빌렸던 책이였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온거나 마찬가지인 저 부분을 읽고, 다케다의 아내에 괜히 빙의해서 한참을 혼자 갑갑해했다. 바빠서 얼굴 보는 시간도 거의 없는 남편이 화가 날 때 베어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항상 사다두는 사과란건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나를 위한 배려일지 몰라도 결국엔 자기는 바뀔 생각도 없고 이야기를 들을 마음도 없으니 이거나 먹고 가만히 있으라는거나 마찬가지같아서. 게다가 왠지 이 둘은 맞선이나 소개를 받아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어째서인지 연애로 결혼한 것 같았기 때문에 얼마나 갑갑하던지. 결혼 전에, 아니, 식당이 크기 전에도 이런 남자였나!

특히 이 때는 내가 아직 이 책이 단편집이라는 걸 몰랐었기 때문에 금방 아내와 화해를 할지, 아니면 이혼을 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갑갑했었다. 그냥 그대로 책을 읽으면 알게 될 일인데도 하필 최근에 본 일본소설들이 다 불륜으로 끝나거나, 불륜을 진행하는 이야기들이였기 때문에 이번만은 불륜을 보고싶지 않아서 더 오만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케다가 여행을 가면서 새 여자를 만나는건가. 그럼 이 뒷편엔 다케다와 새 여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다케다는 후회를 하며 아내를 잊지 못하고 찌질대는데 아내는 다케다보다는 돈을 못 벌지만 젊고 (왠지 젊을 것 같았음) 잘생긴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등등 혼자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이렇게 된 이상, 맞든 안맞든 공부한다 생각하고 타로를 뽑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뽑아봤던 문제는 다케다의 아내가 집을 나가기 전 어떤 상태였을까

사용한 카드는 막스웰 밀러의 유니버셜, 메이저. 스프레드는 몸 - 마음 - 정신의 3카드를 뽑았다.
그리고 뽑힌 카드는 매달린 남자와 별(역) 그리고 연인(역).

많은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개 매달린 남자는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서 자주 나왔었다. 힘들고 힘들어서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 주위의 배려나 안부인사도 부담스러운 그런 상황이라고 해야하나. 스스로 응어리를 풀고 극복해야하는 상태에서 나오는 카드에 가깝기 때문에(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집을 나간게 그녀가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약이였을지도 모른다.

별의 역방향은 사그라든 희망.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이 정신적으로 고립된 상황으로 보고 있다. 막스웰 밀러의 유니버셜은 두꺼운 한글책과 같이 오지만 역방향에 관한건 나와있지 않아서 (그냥 알아서 생각하라는 방임주의..) 자주 나오는 몇몇 카드 외에는 파악이 잘 되지 않아서 어렵다. 어쨌든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별의 역방향은 대충 저런 뉘앙스.

마지막으로 연인의 역방향은 그나마 내가 이 카드 역방향중에 제일 잘 읽는 거라 나왔을때 좀 기쁘기도 했다-_- 아직 다른 덱으로는 실험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막스웰의 연인 역방향이 뜨는 사람의 경우 쾌활하고 분위기를 잘 맞추는 기본적인 성격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주관이 이미 잡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 타입이기 때문에 더더욱 타인의 잣대에 민감하고, 그게 터무니없고 근거없는 비방에 불과할지라도 깊이 상처받는다. 다케다의 아내는 다케다의 진중함과 무거운 면을 완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활발하고 발랄한,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아니였을까 생각해봤다. 그렇기 때문에 더 견디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해서 짠했다. 짧은 머리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일거라는 괜한 추측도 하고 있다. 음.

다케다가 후회하고 있기도 했고, 둘이 다시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연애운도 봤었는데 음....다케다가 서두르다 실수하지만 않으면 잘 되지 않을까 싶고...단편이라 뒤를 알 수 없는게 갑갑하면서도 둘이 잘 됐을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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