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그랬다. 그때 그때 현실에 자신을 몰입시켜 자신이 카메라가 되고, 녹음기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것을 시간을 들여 가라앉을 것과 떠오를 것을 구분한 다음 글을 쓰는 것이 살아있는 글이라고. 물론 이건 그가 여행기를 쓰는 방법이라고 했지만 보통의 '동물원에 가기'를 읽고나니 하루키의 저 말이 생각나서 몇일 마음 속에 묵혀두기로 했다. 그래, 솔직해지자. 보통의 글이 내게 어려웠다(.. ) 바로 리뷰를 쓰자니 뭐가 뭔지 걸러낼 수가 없어서 몇일 묵히고 나면 그럴싸하게 쓸 수 있을까, 싶었다. 결과는 꽝..애초에 가라앉히고 떠올릴게 없어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게 하루키의 방법은 쓸모가 없었다. 역시 난 산만하고 단순해도 그때그때 떠오른 단어를 낚아 늘어놓고 보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동물원에 가기 中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


보통의 문장은 어렵다. 영어책을 읽을때마다 느끼는 '단어만 놓고 보면 알겠는데 이어놓으니 뭔 소린지 모르겠다'의 우리나라버젼이라고 보면 좋을 듯 하다. 분명히 우리나라 문장이고 아는단어들인데 문장을 읽고나면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광활하고 추상적이라고 해야하나?

처음엔 그런 문장들이 '잘난척하는건가, 배운 사람이라 이거야?'하면서 빈정상했었는데 조금 더 읽다보니 잘난척이 아니라 이 사람의 말투라는 걸 알게되고, 또 그걸 알게 되니 조금 귀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남자, 이런 광활하고 추상적인 사고의 나열과 말투가 연애할때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서 소심해지는데 그게 또 너무 귀여워서 책을 읽다말고 한참 웃기도 했다. 연애에 성공한 것 같으니 다행이지만 이 남자, 뭔가 어설프다고!!


  1.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자신있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상대를 향한 강렬한 욕망은 유혹에 필수적인 무관심에 방해가 된다. 또 상대에게 느끼는 매력은 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니,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완벽함에 자기 자신을 견주어 보기 때문이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모조리 잃었다는 뜻이었다. 그녀와 비교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녀가 내 초라한 입에서 떨어지는 말[그나마 내 혀가 풀려야 가능하겠지만] 가운데 몇 가지에 기꺼이 대꾸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하물며 나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또 아주 우아하게 차려입고 나왔다는 것["이 옷 괜찮아요?"그녀는 차 안에서 묻더니 덧붙였다."괜찮아야 해요. 여섯 번씩이나 옷을 바꿔 입어볼 수 없는 것 아니예요?"]은 최고의 영광 아닌가.

라던가

   3. 이런 식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면,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하기 힘든 어떤 다른 인물로 위장할 필요가 생긴다. 나보다 우월한 존재의 요구를 탐색하여 거기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유혹자의 자아를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운명인가?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유혹의 이 단계에서는 그렇게 된 것이 사실이다. 유혹자라는 입장 때문에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하고 묻지 않고 "그녀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하고 묻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내 타이가 어떤가?"하고 묻지 않고 "그녀가 내 타이를 어떻게 볼까?"하고 묻게 되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이 질문의 재귀적 운동 속에서 나의 자아는 일종의 배신과 비진정성에 점차 물들 수 밖에 없었다.

하는 것,
그리고..

  7. 어쩌면 침묵과 어줍음은 욕망의 애처로운 증거로서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상대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능란한 유혹 솜씨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어줍게 유혹하는 사람이야말로 상대를 향한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같은 이름을 가진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라는 책을 보면, 메르튀유 후작부인은 발몽 자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몽 자작의 연애편지가 너무 완벽하고 너무 논리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연인의 말로 볼 수 없다고 까탈을 부린다. 진정한 연인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말은 조리가 안 선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랑에 걸려 비틀거리고, 욕망은 명료한 표현을 찾지 못한다[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는 나의 말의 변비를 발몽 자작의 풍부한 어휘와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는 것 등등.
정말 클로이(그가 사랑에 빠진 여자)를 앞에두고 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거야?하고 묻고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다른 생각으로 빠져버려서 어찌나 귀여우면서 웃기던지..;

히트는 이거다.


   15. 클로이는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디저트를 먹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가지밖에 선택할 수 없었지만 욕망은 한 가지가 넘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초콜릿이 나을까요, 캐러멜이 나을까요?" 그녀가 물었다[이마에 죄책감의 흔적이 드러났다]."
"하나씩 시킨 다음에 나누어 먹을 수도 있겠네요."
  나는 둘 다 먹고 싶지 않았다. 그때까지 먹은 것도 소화가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초콜릿을 정말 좋아해요. 그쪽은 어떠세요?" 클로이가 물었다.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전에 어떤 남자를 사귄 적이 있는데, 아까 말하던 로버트란 사람 말이에요. 나는 그 사람하고는 한 번도 편했던 적이 없어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죠. 그러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분명해졌어요. 그 사람이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았던 거예요. 아니, 그냥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싫어했어요. 초콜릿바를 앞에 갖다놓아도 손도 내밀지 않을 사람이었죠.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 점이 분명해지자, 짐작하시겠짐나, 우리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해졌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둘 다 시켜서 다 맛을 보는게 좋겠군요. 그런데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세요?"
   "나는 상관없어요."
   클로이가 거짓말을 했다.
   "그래요? 상관이 없으시다면, 내가 초콜릿을 먹죠. 나는 초콜릿이라면 도무지 참지를 못하거든요. 저 아래 있는 더블초콜릿 케이크 있죠? 저걸 주문해야겠어요. 다른 것보다 초콜릿이 훨씬 더 많이 든 것 같으니까."
   "정말 벌 받을 짓을 하시네요." 클로이는 기대감과 수치가 뒤섞인 감정 때문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뭐 어때요? 그쪽 말이 절대적으로 옳아요. 인생은 짧고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16. 그러나 나는 거짓말을 했다[주방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성경에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거짓말을 했다는 일화에 빗댄 말].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초콜릿에는 알레르기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초콜릿을 사랑하는 것이 클로이와 맺어지는 문제의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내 욕망에 정직할 수 있단 말인가?

 (동물원에 가기 中 '진정성'에서)


알랭 드 보통의 글은 '동물원에 가기'를 읽어본게 전부이지만 확실히 아는 것도 많고, 그 이야기를 잘 풀어나갈 줄도 아는 사람임과 동시에 사람사이의 일에선 서툰듯한 느낌을 줘서 아, 이 사람의 에세이를 먼저 읽은게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적인 면을 먼저 봐서 이 사람의 글을 읽어도 더이상 아는 것 많다고 질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하는 생각을 하게된 이유도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싫어하는 초콜렛을 억지로 잔뜩 먹고 헤어지며 데려다준 그녀의 집 앞에서 결국 화장실을 빌려버린 서툰 사람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나..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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