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생활은 아무런 재미가 없지."
  나는 그 말에 감동했다. 내가 할머니가 되면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도. 할머니는 그 말이 내 안에 묵직하게 가라앉는 때를 가늠하고는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좋은 날도 있을 게다. 보다 큰 의미에서 말이야.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가장 나쁜 것과 가장 좋은 것이 함께하는 법이란다. 에너지를 증오하는 데 함부로 써서는 안 돼. 끊임없이 가장 좋은 것을 찾도록 해라. 흐름에 몸을 맡기고 겸허해지도록 하고. 그리고 산에게 배운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늘 사람들을 돕도록 해라. 증오는 너의 몸 세포 하나하나까지 무차별적으로 상처를 입힐 거야." (p 35)



 예쁜 파스텔톤의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처음 생각했던 것은 '예쁘다' 그리고 '얇다'.
 그리고 두번째로 생각했던 것은 '역시 선인장이 있구나' 라는 것과 역시 '예쁘다'.

 하늘색의 예쁜 표지에 그려진 커다란 선인장 그림과 반질반질하게 빛나서 굉장히 예쁜 하늘색의 가늠끈. 군데군데 눈처럼 흰 알갱이가 떠있는 표지는 펄지에 인쇄되어있어서 볼때마다 마냥 예쁘다-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 그녀의 방한기념으로 출간된 왕국의 이미지입니다.

 첫인상은 이렇게나 좋았던 '왕국'이지만 책을 읽어가는 중에는 그리 좋은 평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변함없이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오고,  주인공은 사람과의 거리를 두는 타입에 식물을 좋아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이지요. 그녀가 할머니와 헤어져 도시로 내려온 후 만난 첫 친구이자 스승인 가에데는 동성애자입니다. 그의 스폰서겸 스승인 사업가와 연인 사이이지요.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게 된 남자는 별거중이지만 이혼을 하지 않아 불륜상태이기도 합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그리고 일본 소설의 트레이드마크라면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보면 식상한 코드들 뿐이예요. 일본 소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언급하곤하는 틀에 박힌 구조. 일상 속의 비일상을 담는 듯 하지만 소설마다 죄다 똑같아 더이상 특별해보이지도 않는 그런 것들. 그래서 이번에도냐, 라며 반 한숨과 함께 읽어갔습니다만은 일본 소설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흔히들 낚인다, 라고 표현하는 그런 부분들이 있잖습니까? 아기자기하게 늘어놓은 소소한 일상이라던가 담담하게 풀어놓는 감정묘사같은거요. 에쿠니와 바나나의 글을 읽다보면 느껴지는 시간의 느린 흐름같은 것들까지.. 문장이 주는 느낌이나 감정에 홀랑 넘어가는 저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낚일 것 같네요. 전 이미 낚였거든요, 파닥파닥하고-_-

  그저 그래보이던 이야기는 왕국 1편, 안드로메다 하이츠 이야기의 후반부. 산에서 자라 사람을 접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본의아니게 연인의 싸움에 가시박힘하게 된 여주인공이 혼자 울다 결국 차를 가져다주며 쏘아붙이던 장면에서부터 재미있어집니다. 여주인공이 의욕을 찾게 되면서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는데 어떻게 보면 어이없지만 어떻게 보면 또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1편의 이야기는 매듭이 지어지게됩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은 같고 (본문 p 30)' 사람은 이러니 저러니해도 결국 작은 존재니까요. 막판에 일어나는 '사건'은 가에데의 연인인 가타오카 씨의 새로운 일면까지 보게 해줍니다. 해피엔딩이고 희망에 가득차 끝나기때문에 마지막 장을 덮었을땐 마음 속 가득 뿌듯함만 차오르더군요. 오랜만에 따뜻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음, 이건 책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요즘 바나나의 책을 읽고나면 그런 생각이 들곤합니다. 그녀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것일까, 사람을 싫어하는 것일까, 하는 것들이요. 무라카미 류와 사제관계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사람 사귀는 것에 서툰 것 같진 않은데 (무라카미 류에 대한 편견) 설마 독특한 사람은 독특한 사람과만 소통이 된다는 그런건가-_-?

 "당신은 지금, 예전 생활과 새로운 생활 사이에 끼여 있군요. 당신은 특별하고 정은 많은데 사람을 싫어합니다. 식물과 관련된 힐링 일을 하게 되겠지요." (p 50) 그녀가 바라던 것은 식물과 관련된 힐링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감상글을 마쳐봅니다. 지난 달에 키친을 다시 한번 읽은 후로는 그녀가 글을 쓰는 단 한가지의 이유가 자꾸 머릿 속을 맴도네요. 그건 도대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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